하나님에 대한 지식쪼가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두고,
"나는 널 정죄하지 않으니 괜찮다 나는 사랑이다
죄악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죄를 막 지어라"
"나는 널 정죄하지 않으니 괜찮다 나는 사랑이다
죄악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죄를 막 지어라"
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널 정죄하지 않으니
"널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우리의 형제가 범죄하거든
가서 먼저 그 형제에게 '경계'하고
그 형제가 "회개하거든",
즉 "그 죄를 떠나거든"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눅17:3-4)
또 한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면서도
그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레19:17 공동번역)
우리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주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모든 진리를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그 여인이 중심을 감찰하시는 주님앞에
죄악에 머무려는 마음이 아닌
심령으로 그 죄를 떠났기에 용서해주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 형제가 "회개하거든",
즉 "그 죄를 떠나거든"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눅17:3-4)
또 한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면서도
그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레19:17 공동번역)
우리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주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모든 진리를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그 여인이 중심을 감찰하시는 주님앞에
죄악에 머무려는 마음이 아닌
심령으로 그 죄를 떠났기에 용서해주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회개를 한다면 용서하라'는 개념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를 가지고 있어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머물고 있는 그 형제가
만약 죄를 떠나지 않고 죄에 머물러 있다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질 때
만약 죄를 떠나지 않고 죄에 머물러 있다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질 때
그 형제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 형제에 대한 '경계'는
그 형제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닌
그 형제가 분명하게 깨닫고 죄를 떠날 수 있도록
그 형제가 분명하게 깨닫고 죄를 떠날 수 있도록
경계해 주라는 뜻이다.
물론 진정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저 형제와 인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 형제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저 형제와 인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 형제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며 인본적인 '용서'라는 이름으로
그 형제가 저지르는 그 죄악을 무조건적으로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마치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총리가 된 후
자기 형제들을 보았을 때와 같은 심정이다.
마치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총리가 된 후
자기 형제들을 보았을 때와 같은 심정이다.
분명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뒤로 가서 울고 올 정도로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쉽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뒤로 가서 울고 올 정도로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쉽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에 요셉 자신을 팔아치웠던
원흉과도 같은 유다가 자신이 동생을 대신해서
희생해 붙잡혀 있겠다는 "회개의 열매를 확인하자"
요셉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정체를 공개했고 용서를 선포했다.
요셉은 마음 속으로 유다를 미워하지 않고 되려 사랑했지만
유다의 '회개'가 확인되기 전까지 용서를 선포해주지는 않았다.
요셉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정체를 공개했고 용서를 선포했다.
요셉은 마음 속으로 유다를 미워하지 않고 되려 사랑했지만
유다의 '회개'가 확인되기 전까지 용서를 선포해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유다가 여전히 악한 죄악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용서를 선포하는것은 그 유다로 하여금 죄악에 머물게 하며
유다를 정말 위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이다.
정말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치가 아닌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의 인정이 아닌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형제를 그져 "오냐 오냐" 해주며 그 죄악을 용인해줄 것이다.
이것 때문에 결국 그 형제는
영원토록 이를 갈며 원망 가운데 불탈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끔찍한 꼴을 당한
형제의 피값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이것은 형제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형제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레19:17와 눅17:3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 대한 당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당부
구약부터 신약까지 동일하게 하나님은
레19:17와 눅17:3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 대한 당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당부
구약부터 신약까지 동일하게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롬1:32,고전5:2,갈6:1,엡5:11)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라는 개념은
우리가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거룩하신 주님보다
더 의롭고 더 자비로워져서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롬1:32,고전5:2,갈6:1,엡5:11)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라는 개념은
우리가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거룩하신 주님보다
더 의롭고 더 자비로워져서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의 인본적 사랑과 용서로
죄를 합리화해주고 죄를 조장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죄를 합리화해주고 죄를 조장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진정 인본주의가 아닌
"진리를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지금 이 지경까지 문둥병으로 전신이 곪아있는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1.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인본적 기준에 긍정을 추구하기 위해
'죄'에 대해 쉬쉬하느라고
교회로 하여금 진정 떠나야 하는 '죄'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지하게 됨으로
사랑으로 죄를 책망해주는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만의 종교 공식을 잣대 삼아 재판장 놀이하고
1.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인본적 기준에 긍정을 추구하기 위해
'죄'에 대해 쉬쉬하느라고
교회로 하여금 진정 떠나야 하는 '죄'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지하게 됨으로
사랑으로 죄를 책망해주는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만의 종교 공식을 잣대 삼아 재판장 놀이하고
미움으로 정죄놀이하는 것이 만연되어 버린 것이다.
2. 거기에다 살아계신 주님이 아닌
머리에 가득찬 지식들과 스스로 만든 종교공식들을 조합해서
사랑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 여호와 이름을 붙이고
사람과 용서의 이름으로 죄를 조장해주는 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진리는 버린 채,
2. 거기에다 살아계신 주님이 아닌
머리에 가득찬 지식들과 스스로 만든 종교공식들을 조합해서
사랑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 여호와 이름을 붙이고
사람과 용서의 이름으로 죄를 조장해주는 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진리는 버린 채,
우리가 만든 종교짓에 열중하느라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이 만든 교리와 전통을 지키느라
이 문둥병이 전신에 퍼져 있는데도
이 문둥병이 전신에 퍼져 있는데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자각도 못하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사랑과 용서는 오직
진리를 따라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랑과 용서는 오직
진리를 따라서만 가능한 것이다.
진리를 따르지 않는 용서와 사랑은
결과적으로 죄를 조장케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죄를 조장케 함으로서
영혼을 살리기는 커녕 영혼들을 더 죽이고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짓을 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짓을 하게 하는 것이다.
즉 진리를 따르지 않는 인본적 용서와 사랑은
사탄의 미혹에 걸려드는 것이다.
교회는 하루빨리 이러한 사실들은 올바로 분별하여
교회는 하루빨리 이러한 사실들은 올바로 분별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쪼가리가 아닌
살아계신 진리 그 자체인 주님께로 진정 돌아와야만 한다.
살아계신 진리 그 자체인 주님께로 진정 돌아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