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4일 화요일

[스크랩]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저자 A.W. 토저 
A.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는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한 ‘이 시대의 선지자’였다. 합리적 이성만을 앞세워 입술만의 개혁을 주장한 자가 아니었으며, 깊이 있는 말씀 이해와 심오한 신학 이해를 토대로 눈물의 기도가 담긴 개혁의 메시지를 전했다. 특히 성령님에 대한 그의 증언에는 하나님의 천둥과 번개가 무수히 내리쳐서 그 메시지엔 언제나 거룩한 불덩이가 이글거린다. 그리하여 성령님에 관한 그의 뜨거운 가르침과 조우한 자는 그 심령에 거룩한 화상(火傷)을 입고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다. 그는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심령을 부흥시키는 설교자였다. 그는 평생 성령님의 불 가운데 매여 살면서 교회와 크리스천의 삶의 개혁과 부흥에 관한 40여 권의 명저들을 저술했다. 이 위대한 사람의 묘비는 너무도 담백하다. “하나님의 사람, A.W. 토저.” 

▣ Short Summary 
가짜 그리스도인은 ‘솜사탕처럼 달콤한 복음’을 제시하면서 산허리의 양지 바른 곳을 약속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죄인을 변화시키지만,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바람은 지옥을 향하여 불기 때문에, 지옥이 아닌 천국을 향해서 걷는 사람은 바람을 안고 걸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인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에 동참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미련한 짓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일’을 지금 당장 중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부자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근심하는 얼굴로 예수님에게서 떠났다. 그는 산허리의 양지 바른 곳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에게서 떠나기를 거부하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다. 사도행전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간에 박해와 고난의 강풍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은 세상이 이유 없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들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앞에 놓인 영광을 위해서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전진했다. 결국 모든 것은 ‘진짜 신앙’이냐 ‘가짜 신앙’이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그 승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 차례 
한국어판 편집자의 글 

1부 누가 진짜인가? 
1장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2장 진짜는 솜사탕 복음을 거부하고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3장 진짜는 주님의 ‘일’보다 ‘주님’에 우선순위를 둔다 
4장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한다 
5장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다 
6장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가 진단법 

2부 누가 가짜인가? 
7장 가짜는 인스턴트이다 
8장 가짜는 인격의 변화를 소홀히 한다 
9장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10장 가짜는 행함으로 죄용서함을 받으려 한다 
11장 가짜는 신조를 무시한다 
12장 가짜는 신학을 경시한다 
13장 가짜는 감정을 등한히 여긴다 
14장 가짜는 영적 균형감이 없다 

3부 진짜는 무엇을 믿는가? 
15장 유한한 세상을 믿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다 
16장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믿는다 
17장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을 믿는다 

4부 진짜는 무엇을 행하는가? 
18장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앞에 복종시킨다 
19장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20장 과거의 후회를 버리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쓴다 
21장 성령으로 변화된 인격으로서 봉사한다 
22장 영적 전투에서 불퇴전의 믿음으로 승리한다 



1부 누가 진짜인가? 

1장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역설’이다. 십자가는 ‘자연인’, 즉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완전히 대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언했다.(고전1:18)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믿지만 전보다 더 충만한 삶을 누리며, 또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 땅에서 활동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늘의 시민이기에 세상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을지라도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철저한 비관주의자이며, 동시에 낙관주의자다. 십자가를 볼 때 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확신하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모두 허사임을 알기에 비관주의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을 통해 모든 사람의 죄가 해결되었음을 믿는 진정한 낙관주의자이다. 

참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혹한 핍박에 고난당한다. 주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결코 쉬운 길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24) 세상은 이런 엄하고 질긴 신앙의 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진리 ‘전부’를 이야기 할 용기가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전진할수록 더 많은 어려움과 원수의 거센 공격에 마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과 고난을 대하는 방법을 배워 시험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에 참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 또한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유하였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 언제라도 사탄을 공격할 수 있기에 사탄은 그를 미워한다. 특히 새신자는 신앙의 전사로 성장하기 전에 사탄의 주요 공격목표가 된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단지 참그리스도인의 죽음에 있지 않다. 잘못된 교리, 불완전한 가르침, 부패한 교회 때문에 생기는 낙심을 이용하여, 그들의 결심을 약화시키고, 확신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의욕을 꺾어놓음으로써 더 이상 사탄에게 위협적인 전사가 되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적당히 타협하는 안온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착각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한다. 적당히 타협할 때 사탄은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성장을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장 진짜는 솜사탕 복음을 거부하고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의 나침반처럼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제공된 구속’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 구원’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와 연합해야 한다. 지적으로 예수님은 주요 그리스도라고 확신하고, 의지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며, 감정적으로 그와 교제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바로 연합이다. 그분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을 아셨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 세상에 대가를 지불해야함을 정직하게 이야기 하셨다. 바람은 지옥을 향하여 불기 때문에 천국을 향해 걷는 사람은 바람을 안고 걸어가야 한다. 강풍을 안고 영원한 평안으로 갈 것인지, 바람을 등지고 산허리 양지바른 곳에 머물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3장 진짜는 주님의 ‘일’보다 ‘주님’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인도해야 우리는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와 동일한 반응을 할 수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갔다가, 그분에게서 다시 그분의 피조물로 나아간다. 하나님을 자주 오랜 시간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순간 모든 사고를 그분이 지배하시도록 해야 한다.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깊은 영성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자칫 ‘주님의 일’을 한다는 미명하에 ‘일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금방 사람들을 탈진시킨다. 우리의 시끄럽고 분주한 활동들이 다 중지되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주의력을 성삼위 하나님께 집중시킬 수 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여라.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이다. 

4장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한다 

참된 영성의 척도는 ‘우리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욕구들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욕구란 우리의 깊은 속에 자리 잡고, 우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며, 우리의 삶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신령한 사람은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욕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욕구, 의로운 삶에 대한 욕구,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 시간을 초월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며, 스스로 사망에서 구원해낼 힘이 없다.(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성결하게 되려는 노력을 버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결을 이루시도록 의지해야 한다. 

5장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다 

세상을 살다보면 때때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를 미몽(迷夢)에서 구하기 위해 마련해주신 모든 수단들을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 

1) 기도 -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함으로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2) 신앙 - 신앙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믿는 것으로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평안한 가운데 행한다. 
3) 성경묵상 - 성경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강하게 하며,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깨우침과 지식을 준다. 
4) 순종 - 하나님의 사람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복종해야 한다. 
5) 겸손 -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신다.(시25:9) 
6) 진지한 사색 - 인간의 사유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7) 성령의 조명 -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는 사색은 무익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셨다. 

6장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가 진단법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 즉 ‘자아인식’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가면을 벗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님을 보내셨다. 우리는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성령님과 협력하여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다음의 자기발견을 위한 질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2)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3) 나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4)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5)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6)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7)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2부 누가 가짜인가? 

7장 가짜는 인스턴트이다 

기계문명이 발달하면서 빠르고 손쉽게 처리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고, 이로 인해 남는 시간을 재미있는 일에 활용하려는 의도로 발명된 것들이 바로 인스턴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스턴트 기독교는 “우리 영혼에게 부과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한두 가지 신앙’의 행위로써 다 할 수 있으며, 그 후에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의 영적 전진을 갈망하는 욕구를 억압한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마치 신생아와 같아서 자라기 위해 영양과 운동이 필수적이다. 지성적이고 도덕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성숙해가야 하며, 영적 훈련과 성장 역시 중요하다. 

우리는 빌립보서 3장 7~16절에 사도바울의 고백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8장 가짜는 인격변화를 소홀히 한다 

죄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우리는 선과 악, 적과 친구,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의 가치판단은 왜곡되어 있고, 사물을 본질 그대로 거의 통찰하지 못한다. 우리가 끈질기게 집착하는 한 가지 잘못된 개념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강처럼 흘러가는 물질과 같아서 평생 이 흐름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함께 흘러간다고 착각한다. 또한 ‘지금 알 수 없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된다’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시간은 인간성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공간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힘을 갖고 있지 않듯이 시간도 그런 능력은 없다. 죄인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변화’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이다. 복음의 능력은 탐욕적인 사람을 후한 사람으로, 교만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바꾼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사55:6) 여기서 변화를 나타내는 단어는 “찾으라, 부르라, 버리라, 돌아오라”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고 하였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스스로 변화해야 하고, 변화 받아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 

9장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징계를 당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 다르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으로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의 결과이다. 십자가는 그가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순종하여 따를 때 그에게 닥치는 고난을 의미한다. 반대로 징계는 ‘불순종의 길’에서 발견된다. 

징계와 십자가를 구별하는 것은 내게 닥친 고난을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징계를 당하면서도 십자가를 진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계는 마땅히 회개해야 하며,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외에 제3의 고난이 있는데, 이것은 화재, 홍수, 사별, 부상, 사고, 질병, 노령, 피로 등등 자연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고난을 선한 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바로 기도와 겸손과 인내로써 역경을 친구로 만들고, 고통을 선생삼아 깊은 영적 진리를 깨닫는 경우이다. 

10장 가짜는 행함으로 죄용서함을 받으려 한다 

은혜는 이성과 모순 되며,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율법주의의 본질은 ‘자기속죄’로 ‘이신칭의(以信稱義)’와 반대되는 개념이며, 이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이단이다. 물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경건한 슬픔’이 있지만(고후7:10), 슬픔의 감정을 곱씹어 만성적 슬픔에 이르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다. 선행을 통해 죄를 상쇄하려는 시도 역시 끝없는 본능적 이단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다. 아버지의 용서를 믿고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탕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기에 그 죄 많은 과거를 잊을 용기를 가질 수 있다. 

회한과 감정적 고행은 겉으로 볼 때 깊은 회개의 증거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사랑’의 한 형태이다. ‘좀 더 선한 자신’을 실망시킨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교만의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존경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존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한 회한이 없다. 

11장 가짜는 신조를 무시한다 

‘신조가 아닌 그리스도를!’이라는 말을 진리처럼 주장하는 신조무용론자들은 때때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죽은 신조’를 붙드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조는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이기에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신조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이 영속성을 가지려면 지식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성이 있는 곳에는 신조가 있게 마련이다. 표준적인 신조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등등- 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고백이며, 우리의 예배 대상이신 하나님, 곧 진리에 대해 명문화한 것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신경을 절대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쓴이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으나 이 글의 대부분은 목사나 전도사의 입장을 많이 반영한듯 보이며, 저는 우리의 신조라도 주님앞에서는 내려 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만이 신조이며 성경만이 진리임을 믿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신조무용론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신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지 인간이신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신 분이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려면 그분에 관한 진리를 제대로 알고 믿어 행해야 한다. 

12장 가짜는 신학을 경시한다 

하나님을 불편하고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신이 화목하지 못하다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겨우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존재를 애써 부인하면서도 그들은 마음 한가운데 두려움과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에게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독교의 계시이다. 

신학이 중요한 만큼 신학의 진리가 사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진리를 삶으로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어도 도덕과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일 뿐이다. 진리는 창조하고 구원하고 변화시킨다. 진리를 알고 순종할 때,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헌신할 때, 비로소 진리는 조명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시작한다. 

[신학이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신학을 모르면 천국가기 힘이 듭니까?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신학을 알아야 주님을 믿을수 있다면, 신학은 반드시 의 학문이 되야할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을 경시하는 태도는 분명 잘못 된것이나, 요즘의 세대를 보면 정말 너무나 많은 목사님들이 배도를 하는 그러한 시대에 신학을 중시하는 것도 잘못이 될수 있습니다. 성경과 성령과 기도로 매일 분별하는 것이 더 중요할줄 믿습니다.]
13장 가짜는 감정을 등한히 여긴다 

우리는 감정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감정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주어진 정상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감정은 지식(인식)과 행동 사이에 놓인다. 타인이 고통당함을 보면(인식), 마음 속에 동정, 사랑, 슬픔, 두려움 등의 감정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의지에 충돌해 긍휼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렇듯 진리가 행위가 되도록 하는 중간에 감정이 있다. 

죄 때문에 진리와 감정과 행동 중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거짓에 치우친 마음은 금지된 것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고 죄악된 행동을 하게 만든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려 스스로를 강퍅하게 한다. 그런 이유들로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감정을 봉쇄하여 감정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의로운 충동들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으로 감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이다. 

14장 가짜는 영적 균형감각이 없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육신적으로는 아담의 자녀요 흙의 아들이다. 이러한 도덕적 이중성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所欲)과 성령의 소욕 사이의 충돌에서 우리는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협력해야 한다. 이때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함에 이르려다 비참하게 실패하거나, 하나님이 우리 성품을 거룩하게 하실 때까지 뒷짐지고 기다리는 양 극단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불균형이다. 

왜곡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본문들을 필요이상으로 강조하다보니 다른 본문들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고, 결과적으로 삶의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두 날개를 모두 사용하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더 멀리 날 수 있다. 

3부 진짜는 무엇을 믿는가? 

15장 유한한 세상을 믿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의 신앙이 견고한 기초를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온전한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이 불신의 말을 쏟아내고, 모든 감각적인 증거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부정하는 모양으로 나타났을 때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신뢰했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참으셨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객관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주관적 믿음은 실존에 근거하므로 참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력이 허락하는 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많이 아는 지식이 필요하며, 그에 기초한 신앙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완전하시고, 성실하시고, 신실하시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죄문제를 해결하셨다.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로 인해 상처받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인간 사이에 서서 양쪽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중재자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풍유나 비유를 많이 사용하지만 이것은 한 차원 낮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 그대로를 체험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성령님의 역사가 필수적 요소이다. 

16장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믿는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식과 완전한 지혜를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의 ‘합리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일하시면서도, 비합리적으로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일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사를 항상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인식 능력 안으로 들어오시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압도하고 사로잡는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게 된다.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모두 거듭난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요14:23) 
임마누엘하시는 예수님은 거룩하고 의롭고 자비롭고 온유하고 겸손히 행하셨던 이천년 전처럼 지금도 똑같이 행하신다. 그런데 신자의 삶에 예수님의 행사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자의 새로운 본성과 옛 본성이 신자 안에서 강렬한 전투를 하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 성령을 통해 영적 싸움에서 벗어나면 신자는 내주하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된다. 

17장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을 믿는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우정’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요15:14)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며, 죄로 인해 깨어진 형상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므로 인간과 하나님은 유사성(닮음) 안에서 서로 조화하고, 융합하며 우정을 깊이 쌓아간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주권자 되시는데 이러한 속성은 어떤 피조물과도 공유할 수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의 지성, 자의식, 사랑, 인자, 거룩함, 긍휼, 성실 등의 속성은 인간과 공유하시며, 우정을 경험케 하는 유사성으로 삼으신다. 

하나님은 자신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인위적인 격식과 자극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 편안해질 때까지 만족하지 않으신다. 천국, 지상, 지옥의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친구가 되는 것은 인간의 ‘최고의 특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우정이 있느냐를 확인하는 시금석은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보고 하나님은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요14: 21~24) 

4부 진짜는 무엇을 행하는가? 

18장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앞에 복종시킨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이 자유의지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존재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셔서 언제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신다. 

선택의 자유가 없으면, 죄도 없고 의도 없다. 본질적으로 죄와 의는 의지적 자유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라도 강압에 의한 것이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며, 죄 역시 법을 어기려는 의지적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선택의 본을 보이셨다.(눅22:42)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는 자신이 최선의 것을 선택할 만큼 지혜롭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선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훌륭한 선택이다. 거룩함에 이르는 비결은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19장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인생의 권태기가 불가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권태기는 흔한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영적인 침체도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침체의 원인이 다양하기에 원인마다 극복하는 방법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육체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으로 인한 피로, 판에 박힌 습관 같은 단조로움 등은 영적 침체의 주요 원인이다. 이러한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하나님께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는 훈련을 하고,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20장 과거의 후회를 버리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쓴다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과거의 삶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았음을 기억하며 과거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잘못을 범하면 안 된다. 중병이 치료된 환자가 건강한 삶을 향해 전진해야 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이 되기 위해 뒤에 있는 것을 반드시 잊어버려야 한다. 

성령님은 죄와 실패가 사라진 공간에 새 생명, 새 소망, 새 관심, 새로운 목적을 위해 수고하는 기쁨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영광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진실하심을 체험하려면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21장 성령으로 변화된 인격으로서 봉사한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중요한 동사는 ‘존재하다’(be)와 ‘행동하다’(do)이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do)는 그가 어떤 사람이냐(be)에 의해 결정된다. 행위가 의로워지려면 근원적인 존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인류의 타락이라는 보편적 재앙은 우리로 하여금 동료 인간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게 만든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셨다. 비정상적인 우리는 “어떤 것이 합법적이고, 무죄하냐?”는 원리에 의해 행동하지만, 주님은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행동하셨다. 얼마나 많이 봉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조건을 붙이며, 변명하는 타산적인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숨기신다.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은 일하신다. 

22장 영적 전투에서 불퇴전의 믿음으로 승리한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하늘의 복이 있다. 
첫째,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면 ‘죄사함, 칭의, 중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 등의 복을 받게 된다. 
둘째, 우리가 기업으로 물려받게 되는 복이 있는데, ‘장차 정신적 및 도덕적으로 완전해지고, 몸이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영원히 그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를 통하여 얻게 된 복이 있는데, 이것은 ‘자아를 이기고 육체의 죄에서 벗어나며,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봉사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가운데 은혜 안에 성장하며,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음을 점점 더 깊이 의식하며, 예배를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세 번째 복의 경우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구하는 만큼 얻을 수 있으며, 적은 것에 만족하고 전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적게 가진 것은 당신이 적게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으로 그분의 풍성함에 따라 영적 선물을 받는다면 그 누구도 영적으로 빈곤한 자가 없을 것이다. 선물을 받기 원하는 내 마음보다 선물을 주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훨씬 더 크시고, 그분은 원하는 것 이상의 선물을 주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함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분량을 늘려야 한다. 또한 우리의 수용성이 풍부해져야 한다. 수용성에 내재하는 것은 ‘관심’으로, 우리는 영적 관심을 풍부히 가져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받은 은사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신자와 교회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할 적은 ‘불신앙, 자기도취, 자기의,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사치를 좋아하는 것, 은근히 세상적 가치에 동조하는 것, 자기를 의지하는 자신감, 교만, 거룩하지 못한 생각’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이런 것들과 싸워서 이겨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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