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쪼가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쪼가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두고,
"나는 널 정죄하지 않으니 괜찮다 나는 사랑이다
죄악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죄를 막 지어라"
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널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우리의 형제가 범죄하거든
가서 먼저 그 형제에게 '경계'하고 
그 형제가 "회개하거든", 
즉 "그 죄를 떠나거든"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눅17:3-4)

또 한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면서도 
그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레19:17 공동번역)

우리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주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모든 진리를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그 여인이 중심을 감찰하시는 주님앞에 
죄악에 머무려는 마음이 아닌
심령으로 그 죄를 떠났기에 용서해주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회개를 한다면 용서하라'는 개념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를 가지고 있어라"는 뜻이 아니다.
죄에 머물고 있는 그 형제가 
만약 죄를 떠나지 않고 죄에 머물러 있다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질 때
그 형제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 형제에 대한 '경계'는
그 형제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닌
그 형제가 분명하게 깨닫고 죄를 떠날 수 있도록
경계해 주라는 뜻이다.
물론 진정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저 형제와 인본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 형제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며 인본적인 '용서'라는 이름으로
그 형제가 저지르는 그 죄악을 무조건적으로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마치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총리가 된 후 
자기 형제들을 보았을 때와 같은 심정이다.
분명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뒤로 가서 울고 올 정도로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쉽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후에 요셉 자신을 팔아치웠던
원흉과도 같은 유다가 자신이 동생을 대신해서
희생해 붙잡혀 있겠다는 "회개의 열매를 확인하자"
요셉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정체를 공개했고 용서를 선포했다. 

요셉은 마음 속으로 유다를 미워하지 않고 되려 사랑했지만 
유다의 '회개'가 확인되기 전까지 용서를 선포해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유다가 여전히 악한 죄악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용서를 선포하는것은 그 유다로 하여금 죄악에 머물게 하며
유다를 정말 위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했던 것이다.

정말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치가 아닌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의 인정이 아닌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형제를 그져 "오냐 오냐" 해주며 그 죄악을 용인해줄 것이다.
이것 때문에 결국 그 형제는
영원토록 이를 갈며 원망 가운데 불탈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끔찍한 꼴을 당한
형제의 피값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이것은 형제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레19:17와 눅17:3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에 대한 당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당부
구약부터 신약까지 동일하게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롬1:32,고전5:2,갈6:1,엡5:11)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라는 개념은 
우리가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거룩하신 주님보다 
더 의롭고 더 자비로워져서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의 인본적 사랑과 용서로
죄를 합리화해주고 죄를 조장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진정 인본주의가 아닌
"진리를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지금 이 지경까지 문둥병으로 전신이 곪아있는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1.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인본적 기준에 긍정을 추구하기 위해
'죄'에 대해 쉬쉬하느라고 
교회로 하여금 진정 떠나야 하는 '죄'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지하게 됨으로
사랑으로 죄를 책망해주는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만의 종교 공식을 잣대 삼아 재판장 놀이하고
미움으로 정죄놀이하는 것이 만연되어 버린 것이다.

2. 거기에다 살아계신 주님이 아닌 
머리에 가득찬 지식들과 스스로 만든 종교공식들을 조합해서 
사랑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 여호와 이름을 붙이고
사람과 용서의 이름으로 죄를 조장해주는 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모양 이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진리는 버린 채, 
우리가 만든 종교짓에 열중하느라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이 만든 교리와 전통을 지키느라
이 문둥병이 전신에 퍼져 있는데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자각도 못하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사랑과 용서는 오직
진리를 따라서만 가능한 것이다.
진리를 따르지 않는 용서와 사랑은
결과적으로 죄를 조장케 함으로서
영혼을 살리기는 커녕 영혼들을 더 죽이고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짓을 하게 하는 것이다.

즉 진리를 따르지 않는 인본적 용서와 사랑은
사탄의 미혹에 걸려드는 것이다.

교회는 하루빨리 이러한 사실들은 올바로 분별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쪼가리가 아닌
살아계신 진리 그 자체인 주님께로 진정 돌아와야만 한다.


- 박성업 선교사 http://www.facebook.com/up0124  

대체 왜 북한에서는 아사자가 나오는 것일까?


대체 왜 북한에서는 아사자가 나오는 것일까?



2011년 전세계 GDP 경제 순위

101위: 파라과이 (223억 달러)
102위: 트리니다드 토바고 (221억 달러)
103위: 북한 (212억 달러)

.................
107위: 네팔 (183억 달러)
134위: 몽골 (87억 5500만 달러)

전체 184개 나라들 중에서 북한의 경제 순위는 103위이다.

90년대 중반에 300만명이 넘는 아사자가 속출한데 이어
현재까지도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는 북한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북한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못사는
저 사진의 순위에 나오는 나라들 가운데, 
북한 외에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아사자는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북한에서 지금도 나오고 있는 아사자들은
김씨 왕조 북한정권이 백성을 먹여살릴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지난 95년부터 97년 3년동안
'고난의 행군'이란 이름으로
북한에서 북한 주민들이 300만명이 넘게 굶어 죽었다.

300만이 굶어죽어 가던 그 3년동안 
북한정권은 김일성 시체 보관소인 '금수산기념궁전'을
약 9억 달러 (1조원 넘음)를 들여서 만들었다.

그 공사비 9억 달러면 3년 동안 북한 주민이
단 한명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는 액수였다. 
또 김정일이 스위스 은행에 보유한 개인 돈은
무려 4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정일 개인이 그 중 9억 달러만을
자신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는 북한 주민에게 풀었더라도
그 지옥같은 3년의 시간 동안 굶어 죽었던 북한주민 300만명 중
단 한명도 굶어죽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지난 1995년에서 1997년 사이 
북한에서 아사자가 발생한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이 1998년에서 부터 2007년까지
북한 정권에 지원한 액수가
다 합하면 무려 69억5950만 달러(8조6800억 원)이다.

저 지원액을 당시 식량으로 환산한다면
북한 주민이 최소 23년간 한명도 안굶어 죽고 먹을 수 있는 식량비용이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우리가 준 23년치 식량값으로
자국의 대량 아사를 막는 것이 아니라
핵개발, 군비증강, 정치범 수용소 확대와 같은
대내외 협박용 전력 증강에 그 비용을 허비했다.

이러한 일은 계속 이어져 2012년 올해에도 역시나
북한 정권은 김일성 생일을 맞아 광명성 3호를 쏘아 올렸다.
발사 1분만에 폭발한 광명성 3호의 발사 비용을 식량으로 환산하면, 
현 싯가로 북한 주민 1900만명의 약 1년치 식량비용이었다.
 
하지만 그 북한주민들의 1년치 식량을
북한정권은 1분짜리 불꽃쑈(?)로 허비하면서도
대한민국을 비롯한 외부 국가들에게는
여전히 계속해서 북한 주민들을 간판 삼아
지원을 해달라고 협박과 요청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 정권은 충분히 자기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도 남을 돈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러 그 돈을 풀지를 않는다.

유물론 사상에 의해 북한 주민들은 어차피 
북한정권 김일성 집안의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소모품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아사를 하든 말든 북한정권은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식량을 자기 백성들의 통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식량으로 자기 주민들이 어려워하는 모습을 통해
되려 외부 국가들의 인간성을 자극해서
삥을 뜯기 위한 선전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렵겠지만, 
이게 바로 북한보다 못사는 나라들에는 나오지 않는 아사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에서는 아직도 나오고 있는 이유이다.


- 박성업 선교사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일루미나티 음모와 베리칩에 관한 어느 목사님의 생각!


사진은 각자 관심있으신 분들이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위 사진은 위성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코로나도 미군 해군 기지의 건물들입니다.

그런데 건물들의 모습이 흡사
나치를 상징하는 문자와 나치 국가의 철십자 모양,
나치 친위대를 상징하는 SS 건물처럼 보입니다.

나치 문양과 스바스티카
영국 해리왕자 나치 복장으로 파티참석

어떤 분들은 이 사진들을 보고
"건물을 짓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나보네요" 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 오게 된
나치 추종자들이 지었네요"라고 하시면서
별거 아니라고 무시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쉽게 그냥 넘어가기에는
꺼림칙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위 사진들을 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신 목사님께 보여드리고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 그리고 베리칩과
세계정부의 세계통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말을 듣고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통합의 일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베리칩은 구원과 666표와 전혀 상관이 없고
과거에 바코드가 사람을 통제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얼마나 유용하게 쓰고 있느냐,
예를 들면 과거부터 교회에서는
기타를 써야 하는냐 말아야 하는냐 논쟁했지만...
암튼 지금은 이 문제로 어느 누구도 논쟁하지 않고
교회에서 잘 사용하고 있다.

베리칩을 받고 안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리칩을 받더라도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로부터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사회를 잘 분석하고 설마 그것이 나쁜 도구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리고 그런 것에 집중하지 말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베리칩을 충분히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바코드와 같은 논쟁이 또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종말론이고 건강하지 않다.
나는 충분히 그것을 받아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선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먼저 받을 것이다.
(이러한 분은 자기만 받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받아도 되겠다고 말씀하실 분입니다.)

그리고 혹 그런 악한 단체와 배후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렇게 진행하다고 치자.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 강하게 일어나서
그들이 그렇게 하려는 것을 막고
오히려 그 시스템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장악해서
선한 방법으로 사용하도록 이끄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정말 그런 기능들이 있다면
오히려 사회를 범죄로부터 막아주고
사회를 안정시키고 아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지 않느냐?

점점 사회는 안정을 추구하고 오히려 그런 칩 때문에
이 사회는 좋아질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베리칩의 긍정적인 부분을 더 보고 활용해야지
너무나 어두운 말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리칩을 안 받으면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을 말해 줄 수 있느냐?
그래서 그런거 말해서 어떻게 하자는 건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말하는 사람들 보면
현실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구체적인 대안을 말하지 못한다.

칩을 안받고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미국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겠다는 미명 아래
미국의 서부생활로 돌아가 현대의 모든 혜택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이 미련한 행동이다.
(아미쉬 교인)

나는 베리칩의 장점들에 대해 들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내 삶에 그것이 유익이 되도록
선한 방법이 되도록 나는 내가 먼저 받겠다.

베리칩은 666이 아니고 666은 더 고차원적인
다른 기술이 발달하여 나오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신학적으로는 탁월하신 분이시지만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베리칩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무지하신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곧 칩을 몸속에 이식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로
신학적으로나 여러 각도로 논쟁을 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베리칩에 대한 단순한 지식적 차원의 논쟁보다는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잘못된 정보들이 우리의 믿음생활에 영향을 주어 
오히려 우리를 패망의 길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2013년 한국의 대형병원에서는
당뇨병 환자들의 몸안에 칩을 삽입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당뇨병 환자들은 수시로 자신의 혈당을 체크해야 하는데
그 칩을 넣으면 24시간 혈당을 감시할 수 있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서 먼저 조치를 취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좋은 것을 어느 환자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몇몇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대형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자기 목사님께서 예배시간에 베리칩 받아도 된다고 하였고, 
더 중요한 것은 칩을 받든 안받든 상관없이
평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목사님의 말씀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루미나티의 전략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게 되면
그냥 칩을 받아도 된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옵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대형교회는
연0중앙교회가 아닌 다른 대형교회입니다.)

조만간 베리칩을 받지 말라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 다니고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칩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가 더 안전해지고 발전하는데
왜 칩을 받는 것을 거부하느냐며
미친 사람이나 범죄자, 테러리스트로 취급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목사님들과 성도들 중에는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왜 그런 문제 가지고 논쟁하는지에 대해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만 다음으로 무서운 것은 미련함입니다.
무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단순한 음모론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전략을 바로 알고 깨어서 주님 오실 그날을
준비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디 주님오심이 임박한 이 마지막 때에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무지함에서 벗어나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영적인 시각을 갖게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 Endtime80

2012년 10월 15일 월요일

할로윈의 유래와 사탄적인 의미





1. 나팔절

레위기 23장에 소개된 이스라엘의 7대 절기 가운데 봄에 지켜야할 4개의 절기 - 유월절과 무교절 그리고 초실절과 오순절은 예수님의 초림 사건으로 이루어질 일(이루어진 일)들을 예표하고 있다.  이에 반해 가을에 지키라 명하신 나팔절과 속죄일 그리고 장막절은 예수님의 재림 사건 때 일어날 사건들을 예표하고 있다.  이 세 절기 가운데 ‘Rosh Hashanah’로 알려진 나팔절은 특별히 예수님의 공중재림과 이때 일어날 ‘휴거사건’을 예표하고 있다.

휴거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인 고린도전서 15장 52절에서는 바로 이 휴거의 사건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휴거의 사건 때,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되는 일과 함께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되고 부활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으러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처럼, 휴거의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나팔절은 성도의 부활 사건을 소망하는 절기이기도 한 것이다.


2. 할로윈 데이의 유래

할로윈 데이의 유래를 살펴보자.

할로윈은 본래 약 2500년 전 아일랜드의 켈트(Celt)족이 사메인(Samhain)이라는 죽음의 신을 섬기면서 죽은 후 인간의 영혼은 사메인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종교에서 비롯되었다. 켈트족은 일년에 한 번씩 사메인 신을 달래기 위하여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 날이 일년의 끝 날인 10월 31일에 행해졌다. 켈트족은 거칠고 강퍅한 민족이므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사람까지 번제로 드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종교집단은 밤에 검은 옷과 검은 두건을 쓰고 횃불을 밝히고 마을마다 다니며 강제로 처녀를 제물로 받아 인신제사를 드렸는데, 마을에 가서 “처녀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다그치고 처녀를 바치지 아니하는 마을은 전체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지구 북반구에 있는 아일랜드는 겨울과 여름이 대부분인데 10월 31일을 여름의 끝이고, 11월 1일은 겨울의 시작으로 여겼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는 10월 31일에는 각종 유령과 마귀와 귀신들이 찾아와 산 사람 속에 들어가 다음 해에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켈트족은 그 유령과 귀신들을 속이기 위해서 집 안의 불을 끄고 사람이 안 사는 집처럼 꾸미고,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기도 하며, 또는 귀신들이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복장이나 가면을 쓰고, 밤에는 동네마다 장작더미를 쌓고 불을 피웠다고 한다.

한편 4세기경 로마제국이 세계를 장악하였을 때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로마 황제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국교화 하자 속국으로 있던 나라들이 자신들의 종교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켈트족의 사메인 숭배 풍습도 인신제사를 제외하고 그대로 기독교 안에 들어왔으며 그 사메인 의식은 몇 세기에 걸쳐서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악습이 퍼지는 것을 염려한 로마 카톨릭의 교황 그레고리 4세는 주후 840년에, 5월 13일로 지키던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s Day)를 11월 1일로 바꾸고, 그 전날인 10월 31일을 그 전야제(All Hallows Evening)로 정하여 로마 카톨릭의 죽은 자 숭배일과 켈트족의 사메인 종교풍습과 연계시켰다. 그 전야제를 All Hallows E’en으로 표기하다가 나중에는 Halloween으로 바뀌었다. 아일랜드와 스콧틀랜드 사람들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그 풍습이 대대적으로 미주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Halloween Day는 사탄숭배자나 악마주의자들의 최고 명절로 자리잡았고 매 할로윈 때마다 세계 각처에서 사탄 숭배자들이 옛날 켈트족들이 행하던 대로 동물제사를 드리며 심지어는 몰래 인신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할로윈 파티에서 사탄숭배자에 미혹되어 가입하는 자들도 많아진다.

이 할로윈 데이는 개신교와 정 반대되는 날이기도 하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로마 카톨릭을 대항하여 카톨릭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이 기록된 문서를 독일의 위텐베르크에 있는 성당의 문에 계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일으킨 날이다. 그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잃어버렸던 성경을 다시 평신도들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참 신앙의 길이 열리게 된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날에 많은 크리스챤 가정의 자녀들이 이방종교의 나쁜 풍습에 젖어 들고 있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의 교회에서는 Halloween Day 에 크리스챤 자녀들이 이방 민족의 풍습을 본받지 않게 하려고 교회 내에서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일”로 지키면서 자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신광철, ‘할로윈의 유래와 현실’)



3. 부활신앙을 조롱하는 할로윈 데이

이처럼, 본래 사탄을 숭배하던 이방인의 풍습이 ‘죽은 자를 숭배하는 날’ - '할로윈 데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교회(로마 카톨릭) 안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원과는 상관없이, 오늘날의 할로윈 데이는 ‘할로윈 코스튬’이라고 해서, 사람(귀신)들을 놀래키기 위해서 얼마나 기발하고 기괴한 분장을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랑켄스타인, 뱀파이어, 좀비로 분장한 사람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며, 파티를 열어 웃고 즐기는 날로 변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할로윈 데이를 전후해서 개봉하는 헐리웃의 영화들과 할로윈 코스튬의 단골 주제인 살아있는 망자, 바로 ‘좀비’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부활 신앙에 대한 일종의 ANTI-TYPE이요, 조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할로윈 데이에 맞춰 개봉하는 팀 버튼 감독의 좀비 강아지에 대한 영화 '프랑켄위니' - 이것이 부활을 묘사(조롱)하는 헐리웃(일루미나티)의 방식이다.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썩지 아니할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사는 것(고전 15:51-54)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사탄의 문화로부터 비롯된 할로윈 데이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프랑켄슈타인’, ‘뱀파이어’, ‘좀비’와 같이 '썩고 천박하고 저주받은 몸으로 다시 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사건을 예표(소망)하는 이스라엘의 절기들(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이 펼쳐지는 가을마다, 사탄 마귀는 자신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자들을 통해 만들어낸 마녀들의 절기 - 할로윈 데이를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신앙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의 단골 분장인 '좀비' -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Anti-Type이요 조롱인 것이다. 


  
                           - 예레미야 -

'므두셀라' 이름의 의미와 주님의 재림!





'므두셀라' 이름의 의미와 주님의 재림!

오래 전에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감명깊게 본 기억이 납니다
영화 제목 '늑대와 춤을'은 주인공 캐빈코스트너에 대하여
인디언들이 부쳐준 이름입니다.

그를 감시하던 인디언들이 그가 자주 늑대와 춤추는 것을 목격하고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이름에는
짓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 무서운 이름은 바로 '므두셀라'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므두셀라는
성경퀴즈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최장수 한 인물이라는 것 뿐인데
그가 최장수 한 이유나 그 이름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  므두셀라의 뜻과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인 에녹인 지어준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에녹은 65세에 아들을 낳은 후부터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창5:21-22) 했다는 사실로 보아
므두셀라를 낳을 무렵 에녹의 삶에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듯 합니다

그 충격적인 경험이 있었기에 아들의 이름을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로 지은 것이며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녹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다가
승천했다는 창세기 5장의 내용인데
이것만 가지고는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와
아들을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한 이유를 알 수가 없지만
다행히 유다서에서 조그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다서 1장 14절에 의하면
에녹이 모든 사람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녹은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계시를 받았으며,
그 심판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예언자적인 삶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이유

에녹이 65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두셀라로 짓고 난 후부터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창5:21-22) 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첫째로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항상 심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혹시 므두셀라가 아파서 눕게 되면
혹 오늘이 심판이 오지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 하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들의 이름 때문에 수많은 조롱과 놀림도 받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에녹은 반드시 심판이 올 것을 믿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섬뜩한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는 몸서리치듯 심판의 메시지를 생각하며
죄에서 떠나 심판을 경고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들이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심판이 오는 것은 필연적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셋째로 날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노아의 삶은 므두셀라의 목숨과 직결된 시한부종말의 삶이였습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
즉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은
반드시 임하게 될 심판을 생각하며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을 300년 동안 지속하여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  왜 므두셀라를 오래 살게 했을까요?: 우연, 섭리

왜 므두셀라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장수했을까요?
우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또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 때의 심판을 천년 가까이 참으면서 실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녹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심판이 있을 거라고 예언하고,
천년 가까이(므두셀라의 나이969세까지) 참고 참으시며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려고 기다리고 인내하셨으며
심판하기 얼마 전에는 노아의 방주를 통해
임박한 심판이 가까웠음을 눈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으면 올 심판을 알리며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이
므두셀라를 빨리 데려가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가 장수한 시간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고 참으시고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 혹 돌이키기를
기다려 주셨던 하나님은
므두셀라를 빨리 데려가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에녹의 예언은 성취 되었을까요?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187+182)였으며
대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는 해에 일어났습니다.

즉 므두셀라가 369세 때 태어난 노아가 600세 되던 해는
므두셀라의 나이가 969세가 되는 해인데,
므두셀라의 향년이 969세라는 것은
969세, 즉 홍수가 있던 해에 죽은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969세,
즉 죽었을 때 홍수 심판이 정확하게 실현되었습니다.
-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창5:25)
-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창5:29)
-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창7:6) 

▶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라(눅21:31)고 말씀하셨으며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 하셨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성경에서 예언한 마지막 시대의 증거들이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이런 증거들에 대하여 말하면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벧후3:3-4)고 비웃고 있습니다.

마치 롯이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심각하게 말하였지만
농담으로 여겼(창19:14)듯이 도무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 결론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를 바라 보면서 반드시 그날이 올 것을 믿고
매일 매일 자신을 점검하는 삶을 3백년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옮겨 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노아나 므두셀라는 이름 때문에 심한 놀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 사람들은
"므두셀라를 죽여서 심판이 오는지 보자"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역시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주님의 재림을 신중하게 생각치않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멸망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1천년 동안이나 기다리셨지만
겨우 노아의 가족 8명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에녹 시대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 비난을 할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도
반드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대홍수 심판이 임박한 사실을 볼 수 있도록
직접 방주를 보여주셨음에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키기(눅17:27)까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제 노아의 방주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한 증거들을 매스컴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의미보다
더 확실한 심판의 증거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8-9)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