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3일 월요일

[스크랩] 어느 목사님의 기도


어느 목사님의 기도 
황상하 목사의 신앙덕담

어느 기도 많이 하시는 목사님이 목회가 너무 힘들고 생활이 어려워서 한 번은 참고 숨겨왔던 마음을 다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 목회도 생활도 모든 것이 참 힘듭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니 저도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의 기도를 늘 듣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이 “하나님, 언제 하나님이 제 기도에 한 번이라도 응답해 주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오늘은 네가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마.”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너무 흥분이 돼서 “하나님,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래, 정말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고요?” “아, 그렇다니까” 이게 무슨 횡재입니까.

그 목사님은 너무나 흥분되고 또 긴장이 되었습니다. 실수 없이 잘 구해야 하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 무엇을 구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 욕심을 부려도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중요한 것을 빠뜨려도 안 되니까 평소에 기도하든 대로 차근차근 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우선 저에게 큰 믿음을 주셔서 신자답게 살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마. 또 구해보아라” “저에게 성령의 충만함과 필요한 은사와 건강과 물질도 좀 넉넉히 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해 주마. 그 다음은 무엇을 주랴?” “예, 저의 아이들에게 믿음과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도 주시고 무엇보다 믿음이 좋은 배필도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행복하게 살게 하여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해 주마. 또 무엇을 주랴?” “교회가 부흥되고 교인들이 다 건강하고 잘 살게 해 주십시오.” “그 기도야 당연히 들어주지. 그 다음은 뭐냐?”

“교계가 너무 어지러운데 엉터리 목사들이나 정치꾼 목사들이 판을 치지 못하게 해 주시고, 말썽 부리는 못된 교인들도 고쳐주십시오.” “그야 나도 바라는 바다. 그렇게 해 주마. 그 다음은?” “이 나라 정치판이 요지경인데, 정치 지도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치를 바로 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지, 그거야 못 들어주겠냐? 그렇게 해 주마. 다음은 또 뭐냐?” “저 북한이 골칫거리인데, 저들이 핵무기 개발 못하게 해 주시고, 북한의 동포들도 다 예수를 믿고 구원 얻게 해 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해 주마. 또 없냐?” “예, 있습니다. 세계 곳곳으로 나가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선교가 잘되어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도록 해주마. 또 있으면 말해 보거라.” “그리스 문제를 좀 해결해 주십시오. 그리스 때문에 주가가 곤두박질칩니다. 그리고 이란이 핵을 못 만들게 해 주시고, 알 카이다, 탈레반들이 테러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폭력적이 되지 않도록 해 주시고, 세계 모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 주시시고, 이 땅에 경제정의가 실현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신다고요?” “그래, 다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언제 들어주시는 겁니까?” “오늘 다 들어주마. 그런데 한 가지는 명심해라.” 한 가지는 명심하라는 말씀에 목사님은 긴장이 됐습니다. 뭐가 잘못됐나싶어 “하나님, 한 가지를 명심하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하자 “이 시간 이후로 너는 다시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다시 못 만나다니요?” “나는 네가 구한 것은 다 들어주겠지만 구하지 않은 것은 줄 수가 없다. 너는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구했지만 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와의 관계는 오늘로서 끝이다.” 

이 말씀을 듣고 목사님은 다급해졌습니다. “하나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끝난다면 제가 구한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이 진심이냐?” “진심이다마다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선택을 하여라. 구한 것을 다 들어주랴, 나를 선택하겠느냐?” 그 목사님 아직까지 결정을 못하고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믿음과 경건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상태가 이 기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정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직하게 따져보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탐심입니다. 탐심이란 무엇이든지 탐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과 가치와 목적과 수단을 내가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인데 사실은 우리 스스로 정합니다. 그것이 탐심입니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고 내가 나의 주인인 증거가 탐심입니다. 탐심에 지배되는 생각의 특징은 나에게 늘 힘과 돈이 모자랄 뿐이지 이해와 지혜와 판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구하는 것을 넉넉히만 주신다면 참으로 하나님 마음에 맞는 멋진 신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과 의견충돌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부모는 철없는 자식을 설득하기 위해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자식은 말합니다.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면서 왜 내가 사 달라는 것은 안 사줍니까?” “네가 원하는 것이 뭔데?” “오토바이!”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토바이가 잘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번 넘어지면 죽거나 일어나도 장애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은 오토바이 안 사주는 것 때문에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가 친부모인가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나에게 해 준게 뭐 있어?” 

앞에서 소개한 목사님의 기도에도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철없는 자식에게 오토바이는 인생의 전부이고 즐거움이고 보람이고 기쁨입니다. 오토바이, 그깟 오토바이, 오토바이가 과부틀 장애자틀인 것도 모르고 오직 오토바이에 인생을 겁니다. 그러는 자식에게 부모는 언제나 탕자의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한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눅 15:31). 

이 사실을 깨달았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32:1)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이유가 돈이 많거나 건강하거나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참 부러운 신앙입니다. 우리는 언제쯤 하나님만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 하박국 3:17,1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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