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7일 금요일

[스크랩] 인본주의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7. 인본주의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본주의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여러 자료를 가지고 어느 목사님이 정리하셨는데, 분량이 많아서 제가 다시 정리하고,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적용을 하여,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인본주의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본주의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본주의는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인본주의는 자기 방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 방법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신앙과 거리가 있는 신앙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

1.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0)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듣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듣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내 판단은 옳다. 왜냐하면 이 판단은 내 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내 생각과 내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판단이기 때문에 옳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사11:2-4)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한 이 구절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고 심판치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판단하고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공의로 심판할 것이고 그 판단이 옳을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예언이 말한 것처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요5:30)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즉,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

표준새번역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만을 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 중심으로 사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사셨습니다.

에필로그

저는 이 말씀알고 있었지만, 제가 생각하였던 이 말씀의 의미를 세계관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 인 것 같지만, 세계관 자체는 시대마다 조금씩 변합니다. 하나님 세계관조차도 우리는 제대로 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1억 원어치 책을 다 버리면서까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성서의 사고방식 자체를 다 버릴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오해해서 보았던, 성경에서 멀어진 사고방식의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말씀 앞에 정직하게 나를 비추어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가짜였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힘이라 설교하고 가르쳤지만, 저는 저의 삶 가운데, 주님만을 오로지 의지한적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을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저의 삶은 오직 주님만 힘 삼은 삶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모습 때문에, 더 죽을 것 같았습니다.

2. 자기 힘으로 산다는 것.

자기 힘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타락의 시작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시험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이브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접근 방법은 하나님처럼 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지 말고 너의 힘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말은 “네가 하나님이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되어라”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타락 핵심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인본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3. 자기 힘으로 사는 삶의 열매

자기 힘으로 사는 삶의 가장 첫 번째 나타나는 현상은 자족감(자만심)입니다.

자기의 처지를 모릅니다. 그것을 자만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여 이루어낸 일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부분만 주님이 자신을 인도하여주었고, 나머지 부분은 자신이 마음대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그 일을 이룬 것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공통된 마음가짐은 교만입니다. 자신이 이룬 사역에 자신이 뿌듯한 자랑이 들어있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의 힘을 의지하여 이루었다면, 뿌듯함이나 자랑이 전혀 없습니다.

라오디아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계3:17)라고 하였습니다. 안일함! 자족감! 자만심! 이게 교만의 극치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아교회 성도들은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전형적인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하던 것처럼 교회에 온갖 세상적인 기교와 행정과 방법과 기법들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이 일 하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그 일이 끝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때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겠습니까? 질문을 하면 모두 아멘 하지만, 예배를 나와서 생업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온데 간데없어집니다. 자신의 생업가운데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위해 내어 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먼저 온갖 계획들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계합니다. 이것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조목조목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순간순간 기도드리고, 주님의 인도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개인의 생업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맥과 자신의 학력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업을 계획하고 진행해나갑니다.

신앙은 단순히 이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안정시키는 진정제역할이지, 자신의 삶은 이론만 가득했지, 현실에서는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라이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칭찬이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면서 먼저 칭찬하시고 나중에 꾸중하셨는데, 그런 칭찬 자체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안목으로 그들의 상태는 벌거벗고, 굶주리고, 헐벗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까지 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문 밖에 계셔서 두드려야만 했습니다. 영적인 눈까지 멀었기 때문에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줄을 알았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의지해서 사는 삶을 보시며, 주님이 하나님의 기준 앞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나타나는 현상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느냐하면, 자기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안일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우리가 가진 것은 옛날에 비하여, 살 만큼 삽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이야기하고, 기도할 기회가 있으면 주님을 의지한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자기의 부, 경험, 지식, 배경, 세상의 힘, 지위, 지식, 친척, 동료, 가진 것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만, 금식하며 굻어 죽겠다며 협박하듯이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보험을 들어둡니다.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 헌금으로 보증금으로 하나님께 헌금합니다. 목사님께 더 기도해달라고 미리 헌금을 드리고 부목사님과 전도사님에게 헌금을 미리 드리고, 자기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갖 자기 좋을 대로 일을 벌여놓고, 마음대로 일을 진행해 나갑니다. 이런 경우에는 잘 되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잘 안되면 목사님이 기도하지 않아서, 혹은 자기가 죄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 모신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이신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힘을 삼을 것 중에, 하나님을 힘 삼는 것을, 하나님을 힘 삼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로는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유일한 힘이 아니고, 자신이 힘 삼을만한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 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만이 유일한 나의 힘 이십니다. 하며 찬양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20세 이상의 장정만 약60만 명이 애굽에서 출애굽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사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크고 심각합니다. 60만 명 중에 단2명이 이 과정에 합격하였습니다. 심지어 이 60만 명은 여호와의 영광을 직접 경험도 하였고, 육성까지 들었던 사람들이었고, 우리시대보다 훨씬 많은 기적과 이사로 그들을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2명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오늘날 나 자신이 60만 명에 속할 확률이 99.99%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도뿐만 아니라 목회자든 신학자든 모두 포함됩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희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신8:1) 하나님의 의도는 겸손케하기 위함입니다. 교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면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하나님이 광야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자기 힘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 삼고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는 자기 힘으로 살지 못하는 곳입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수법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명밖에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힘 삼지 않는 죄성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처음 하나님의 기준을 접하게 되었을 때 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최초의 우리 조상 하와 할머니가 받은 유혹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내가 얼마나 지금 상태가 위험하고 위태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주님 의지하여 산다는 설교 참 많이 했습니다. 또 그렇게 기도로 고백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게 되며, 나 자신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서, 나의 입술로만 주님 의지하였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나는 주님 의지하고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특히 60만명중에 단 2명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만 유일한 힘 삼을 수밖에 없는 광야에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와 홍해를 가르는 기적과 놀라운 이적들이 있었기에, 하나님만을 힘 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명밖에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상황보다 더 주님만을 힘 삼을 수밖에 없는 더 좋은 환경이었는데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광야의 이스라엘백성보다 더 좋은 환경이기에, 주님만을 힘 삼을 환경이 과거 이스라엘보다 훨씬 좋습니다. 정신이 확 들더군요. 내가 그 2명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었고, 지금도 그 마음입니다.

주님이 청소년시절 육성으로 저에게 이 땅에 일으키실 이슬람과 개신교와 케톨릭의 십자가 복음의 부흥을 이야기하시면서, 저에게 하실 일들을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나가되, 인도네시아 A지역에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려면 후원금 모금을 해야 하는데, 모금을 해도 모금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원모금을 하지 말고 믿음으로 선교지로 나아가라 하셨습니다. 막상 선교사로 나가려고 보니, 저를 후원할 교회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국 프리메이슨은 제가 선교사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꾸준히 방해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에게 오직 믿음으로 후원모금을 하지 말고 가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후원 모금을 하지 않고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선교지에서 오직 주님만이 유일한 힘이신 것을, 이슬람 공동체에 깊이 들어가 살면서 경험하게 하시고, 기적들을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주님만 나의 유일한 힘인 것을 경험하고 실제로 살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선교역사상 처음으로 선교사가 굻어 죽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우리나라 선교사 중 선교후원모금을 하지 않고, 믿음으로 선교지에 나아간 사람은 제가 처음이고 마지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매달마다 나오는 과거의 벌어놓은 돈이나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것

신앙생활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겁니다. 이것은 기복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였냐면, 예루살렘에서 인도까지 비행기도 차도 기차도 없는 시대에 위험을 무릎 쓰고 특별한 향료를 사다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데 사용할 정도로 그들은 헌신적이었고, 희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향료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헌신을 기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헌신과 봉사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헌신 중심에는 탐심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정성을 들인 이유는, 자기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자기들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고, 자기가 잘 되는 것이건, 자식이 잘 되는 것이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채워주시도록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와 헌금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탐심이 가득하다고 이야기 하시면서, 전혀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말이 바로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목적으로 사는 것 또한 자기 방법대로 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을 살도록 구원하셨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20)

우리가 우리 속에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거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 는 말입니다.
성경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이로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속에 대한 예가 노예제도의 예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노예제도가 있었는데, 그 당시의 노예는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에 자유롭게 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노예이니까 자기는 소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자기를 사려면 돈이 있어야 되는데 돈을 벌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주인의 소유이니까 일 하는 만큼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노에는 스스로 자기를 자유롭게 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돈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사서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줄 때, 이 돈을 지불하는 돈을 랜섬(Ransom)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온 것을 너희를 위하여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 그 말은 우리를 위한 “Ransom”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우리 자신을 구속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치닫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Ransom이 되심으로,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면서, 그러면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하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바 되었으니 더 이상 너희의 것이 아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라. 주의 목적을 위해 살라 그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소유로 소유권이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는 뭐에만 익숙한가하면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예수 믿으면 사업 잘 되요!”“문제 있으면 와서 기도하세요!” “입시철 특별기도해서 애 좋은 학교 가게 하세요!” “신년 축복 대성회” “복 받으세요” 이런 메시지가 만연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메시지들은 그 평화의 메시지와 똑같은 메시지ㅏ 그대로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너무 팽배해 있기 때문에 “너희는 값으로 사신바 되었으니 너희의 것이 아니요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주를 영화롭게 하라” 그러면 그 말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성경에 있었나? 그만큼 우리는 옆으로 가고 있습니다. 가짜로 사로잡혀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속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게 소유권이 이전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것이 아니니, 우리의 목적, 우리의 목표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 우리가 구속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길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목표와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구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값으로 사셔서 죄와 사망과 사단의 종이 되어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를 구속하셔서 죄에서 사망에서 자유케 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죽음에서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목표와 목적이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27:1-3)

다윗은 실재로 사울이 온 나라 모든 군대와 경찰의 정보력을 다 동원해서 이를 대적하여 둘러 쌀 때에도 승리하였습니다. 그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느냐하면, 하나님만이 자기 빛이요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다윗이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다윗은 하나님이 전부이고 유일한 목표 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아래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기도를 보고 그렇게 닮고 싶어 하지만,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윗처럼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 인 삶을 살지 못합니다.

에필로그

사람들은 자기 탐심이 가득한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특히 저의 경험과 저의 주변에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기로 결단한 목사님들의 공통된 목소리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서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에 자기의 야망이 섞여서, 목회성공이라는 교회성장 일변도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죽어라 심방하고 가르치고 사역하는 이유는 교회가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마음속에 때문입니다. 가슴에 손을 얻고 정직하게 고백하라면, 교회성장과 순수한 마음으로 사역하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에 가깝냐고 물으면, 둘 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것이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숭배라 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나의 야망과 주님의 소망이 섞여있는지 없는지 깨닫게 하신 나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 열심히 사역하면서, 교회가 성장하고 난 후 내가 받을 주변으로부터의 칭찬과 부러움 그리고 존경을 한번이라도 생각하였다면, 지금 나의 야망이 주님의 소망을 빌미로 주님을 이용하고 있다고 분별하였습니다. 설교가 마친 뒤 설교에 은혜 받았다는 성도들의 소리가 좋아서, 설교 한 후 그 소리 듣기를 기대하였다면, 나는 이미 이생의 자랑에 빠져있는 사람이라 분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도가 많이 예배에 참석하면 기분 좋고, 적게 참석하면 힘이 빠지는 것이 보이면, 이미 하나님이 유일한 힘이 아님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목표라 자신은 믿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도 유일한 목표이고, 교회성장 또는 목회성공도 유일한 목표임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동일합니다. 선교적 성과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프로젝트 사역을 합니다. 프로젝트 사역 자체가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먼가 열심히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역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선교지는 한국보다 사역이 힘들고 열매도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열매를 기대하고 무언가 하고 있는 것을 기대하지만, 그런 열매가 일어나려면 10년 이상을 기다려야하는데, 한국의 교회는 그것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보기 좋게 소개하기 쉬운 것이 프로젝트 사역입니다. 무슨 센터를 건립한다. 신학교를 건립한다. 학교와 출판사 사역을 한다. 사역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중요한 사역이지만, 사역을 계획할 때 선교사의 마음에 동기가 어떠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수많은 제 속에 있는 우상들 때문에 교회성장, 선교사역의 성공 모두를 포기하였습니다. 선교편지 내용도 일반적인 선교사 선교편지와 완전히 다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잘되고 기도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업이 잘되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사업을 통해 동참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되고 건강한 것은 그 자식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재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자신의 인생을 제조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조금 더 상태가 좋아지면 감사하고 헌금하고 간증을 하지만, 하나님이 목적이 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재조정한 상태로 나아갑니다. 저는 거의 그런 사람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재조정한 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새벽기도에 나오는 이유가 자식 잘되고, 사업 잘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하는 하나하나가 다 잘 되게 하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어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기도제목을 잊은 채,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목청껏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회가 썩었느니, 교회가 생명이 없느니, 목사가 타락했느니 하며 비판합니다. 자기 자신을 못 본 사람이 하는 전형적인 패턴인 것입니다. 기껏해야 윤리적인 몇 가지 사실만으로 교회가 썩었느니 목사가 썩었느니 비판하는데, 하나님은 그 너머를 보십니다.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더 엄청나고 실제적이고 숨길 수 없는 마음의 생각을 가지고 판단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자신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려 합니다. 주님을 위해 많은 헌신과 봉사와 헌금을 통해 봉사한 자체로 하나님 앞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야망을 그리고 조금이라도 자기 유익이 내려놓아 지지 않으면, 그 어떤 수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실 앞에 처음 주님의 기준 앞에 저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저의 감정은, 죽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한 달을 울고 울었던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였습니다.

자기 방법대로 사는 것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을 성경은 “길로 행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상 이 지면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설명하려면 너무 분량이 많아서 다음 하나님의 기준 주제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간략하게 자기 방법대로 하는 것을 자기 길로 갔다고 합니다.

자기 방법대로 사는 것을 인본주의라 합니다. 하나님을 일을 하되 인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모든 것을 인본주의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어렴풋이 혹은 확실하게 알지만, 길(하나님의 방법)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인맥과 학위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어 드리기만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편법으로 통용되는 모든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어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이 지면을 통해 전형적인 인본주의의 대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리메이슨입니다.

프리메이슨은 케톨릭 비밀 단체이면서, 종교통합을 위해 수많은 종교인들을 끌어들여 멤버로 만들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 맴버가 되기 위해서는 마인드컨트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작업을 합니다. 개인에 따라 다른데, 보통 1주일에서 1달 동안 정체성을 바꾸고 맨탈을 부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때 많은 가치관과 생각들이 파괴됩니다. 그렇게 맨탈 붕괴 시키면서 중요한 몇 가지 핵심사항을 집어넣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에게 정한 정체성에 대한 것과, 그 사람이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몇 가지 사명을 넣어 주면서 모두 파괴합니다. 신앙적인 부분은 너무나 강해서 파괴가 안 되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변질을 시킵니다.

마인드컨트롤로 정체성이 변하는 1주일에서 1달 기간이 끝나면, 맨탈이 붕괴되고 다시 회복하는데 천천히 회복하게 됩니다. 이 기간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이 중요한 타이밍일 때, 프리메이슨으로 교육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프리메이슨에 동화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많은 가치관과 기억과 신앙까지 갑작스러운 충격(마컨)으로 붕괴되고, 다시 회복하기 원할 때 프리메이슨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수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므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는 새로운 프리메이슨 맴버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가장 쉬운 우리 주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천지도 프리메이슨이 만든 이단 집단입니다. 이만희씨를 마인드컨트롤로 사도 요한으로 정체성을 바꾼 것이 1996년도 말입니다. 여러 번 이만희 씨를 접촉하였고 천천히 마인드컨트롤을 걸었습니다. 1996년 말에서 1997년 초까지 수차례 만났고, 몇 년 후 맨탈 붕괴 후 신천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요한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단을 만든 이유는 개신교를 어지럽히기 위함입니다.

개신교와 케톨릭의 선교 전략 중에 내부자운동이라는 전략이 있습니다. 제가 그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타종교에 자신의 종교를 숨긴 채 들어가서, 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과 그들의 종교까지 배웁니다. 그리고 그 속에 복음만 전하면, 그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평화의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이 사람을 개신교로 개종시키지는 않습니다. 개종하느냐 남아서 무슬림으로서 복음을 전하느냐는 평화의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합니다. 여전히 무슬림으로 남아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정체성을 정한 평화의 사람은, 현제 수많은 모스크가 변화되어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는 곳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심지어 이슬람 신학교까지 모세오경과 시편 신약성경을 모두 외우지 않으면 졸업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음 들어오는 이슬람 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화된 사역들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교하는 선교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극소수의 선교사들이 하고 있는 최전방 비밀 선교사역입니다.

저를 만난 프리메이슨 맴버들은, 제가 하고 있는 내부자사역을 이만희 씨에게 한국교회들에게 접목하여 가르쳐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이만희 씨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사용하고 있는 내부자운동을 개교회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접목하도록 유도한 것이, 지금 신천지가 각교회에서 엄청난 혼란을 주고 있는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1년에 한번 마인드컨트롤이 플리지 않도록 이만희 씨를 점검하고 개교회를 어지럽히는 전략들과 자신들의 체제를 이끌어갈 것을 코치합니다.
케톨릭 프리메이슨은 개신교를 배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인드컨트롤 당하여서 맴버가 됩니다. 그래서 개신교를 탄압하되 법적으로 입증될 만한 아무런 근거 없는 방법과 첨단 과학 기계를 사용하여 목사들을 타깃 삼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모든 방법을 합당하게 여기는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인본주의입니다.

프리메이슨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사명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세상의 끝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세상의 모든 상황을 요한 계시록의 예언대로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선이든 악이든 방법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합당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또 종교를 통합하고 통합된 종교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 것이 그들이 가진 종교정책입니다. 전략적으로는 문제없어 보이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행동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다.” 고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도,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길을 물어야 합니다.

에필로그

교회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성령이 하나도 필요 없이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좋은 시스템과 담임목사의 장점이 긍정적으로 작용되면 가능합니다. 성도들의 불편함을 담아 온갖 설문지를 통해 성도들의 만족감을 줍니다. 이것이 틀린 것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지만, 이것을 시행한 동기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고, 성도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마음뿐입니다. 성도들 마음속에는 하나님 기준에서 멀어지고 온갖 죄에 헐떡이고 있는데, 그들에게 외적인 편안함을 주기위한 표면적인 세상의 온갖 서비스가 교회에 만연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불편한 설교를 하지 않기 위해 늘 복을 설교하고, 격려하고 힘을 얻는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성도들을 진정으로 말씀 가운데 세우려면, 가슴 아픈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서 그 가운데 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 시므온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를 한마디로 정의하였습니다. “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2:35)

예수님이 성도들을 바로 세우시는 방법은 상처를 내어 자신을 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타락함을 보고서 십자가 앞에 나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모본적인 목회 스타일이셨습니다. 무조건 성도의 죄를 들추어내서 추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 삼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기 때문에 십자가를 의지하여 순간순간 매일매일 하나님 보좌 앞에 머무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권고와 평안을 위해 치유설교 중요합니다. 힘을 얻게 하는 설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변도는 예수님이 하신 모범이 아닙니다.

대형교회들 중에 많은 교회는 대표기도가 5분이 넘으면, 대표기도자 소속 교구 부목사님이 담임목사님실에 불려가서 야단맞고 옵니다. 예배시간에 조금이라도 순서가 정확하게 진행되지 않거나, 조명이 어긋나면, 그날 예배진행 팀은 긴장하고 야단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더 정확한 예배를 위해서 큐시트를 짜서 초단위로 순서를 진행시켜나갑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틀렸고 비성서적이라고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운데 성령은 없어지고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남을 추구하도록 진행되어지지 않고, 순서가 중요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더 이상 성도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지 않으면, 교회는 휘황찬란한 분위기 이벤트와 화려한 교회내부구조를 추구합니다. 성가대를 돈을 주어서라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힘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으로, 성령이 더 이상 개개인 성도들에게 역사하지 않는 빈틈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주님께 헌신할 종목들을 정합니다. 새벽기도, 전도대 참석, 헌금 얼마, 심지어 일천번재 예물을 드리면서 1천일동안 헌금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빚을 지게 합니다. 그리고 자시가 이루고 싶은 것을 주님께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신앙형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하나님께 빚지게 한 마음을 가진 헌금, 봉사, 헌신, 성경공부 등 모든 신앙행위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의미 없는 혼자만의 원맨쇼였습니다.

선교지에서 후원모금을 위해 선교편지에 여러 가지 기교를 부립니다. 무엇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필요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문구를 넣으면, 정말 선교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후원해주기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틀린 것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면, 제가 누구에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십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기도 부탁하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본인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주님은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는 제가 필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굻어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 몇 번 오늘 필요한 양식을 위해 기도한 적 있습니다(주기도문처럼). 저의 필요를 위해 기도제목으로 선교편지에 넣거나 표시를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랬더니 더도 덜도 아닌 딱 적당하고 필요한 만큼만 주님이 주셨습니다. 적게 주시면 그렇게 적게 생활을 유지하고, 많이 주시면 거기에 맞게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많이 주신다는 것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중산층보다는 못하지만, 우리 처지에 그렇게 보일 뿐인 상태입니다.) 필요한 사역비가 필요하면,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저 그리고 저의 아내만 그 사실을 알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주님이 한 번도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주님은 늘 채워주셨습니다. 죠지 뮬러의 삶을 우리도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적어놓고 후원을 기대하지 않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정직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저의 마음에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고, 단지 제가 주님만 유일한 힘 삼고 있는 간증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저의 동서형님(아내의 언니 남편)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동성형님이 다니고 있는 교회는 시스템과 온갖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장하고 있는, 성도들의 수평 이동형 대형교회입니다. 대형교회이기 때문에 기존의 장로님들은 동서형님에게 교회 개혁을 주문하였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빛을 청산하자는 운동을 새로된 장로 선출된 사람들에게 기대하였습니다. 기존의 장로님들은 교회의 빛을 청산하려는데, 담임목사도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장로 선출된 사람들이 추진하였으면 좋겠다며 마음껏 부추겼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담임목사는 교회 빚을 청산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빛을 청산하려고 마음먹으면 자신이 가진 재산을 교회에 헌금 하면서 모법을 보여야 되는데, 은퇴가 몇 년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안하는 겁니다.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주동하고 전면에 나서면, 자신이 모범을 보여서 자신의 재물을 헌금하는 모범을 보여야 되는데, 그러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바로 장로 선출된 사람들을 부축인 이유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극히 일부분의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가끔가다가 그렇고, 주변의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목사님들의 고백을 들어도 동일한 고백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기 힘으로, 자기 목적대로, 방법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렴풋하게 조금 부족하지만 하나님 의지하여 살 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성경에서의 진리를 알려주어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보여주셔야 합니다.

또한 잠시 자신을 볼 수 있었더라도, 그 때만 잠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지, 다시 자신은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힘으로 살 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100명중 99명이상 이런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목적삼고 살기로 결단하는 계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난 후,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하여 후회스러운 감정까지 가게 됩니다. 자신만 바로 보면 한없이 한심해서 십자가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의 감정이며, 예수님 이후 2000년 역사동안 부흥이 이 땅에 일어날 때마다 나타난 회개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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