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7일 금요일

[스크랩] 교회안에 있는 귀신들...정확하게 써놓으셨네요..


 


교회안에 있는 '바리새인의 영'

사단이 교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은 바로 ‘바리새인의 영’입니다. ‘바리새인의 영’은 극심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바리새인의 영’이 아벨을 죽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게 하였고, 사도 바울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리새인의 영’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소멸하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성도들을 멸하려 하고 있습니다.

본래 바리새인의 영은 하나님의 은혜는 경멸하면서 율법주의는 사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거부하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 그분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돌이 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구약 성경을 해석했고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따라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했으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보다는 그들 스스로 세운 전통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죄인들에게는 관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친절한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으셨으며 그 어떤 축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태복음 23:27)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한복음 8:44)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마태복음 27:17-18)

오늘날 교회 안에 ‘종교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 높임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높은 직분을 가지는 것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그들은 전통과 율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던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단지 그들의 거짓된 의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에 만족합니다.

이런 ‘종교의 영’은 지금까지 교회에 침투해 왔던 그 어떤 악한 것보다도 더욱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만이 진정한 부흥을 일으키는 생수의 강을 이 땅으로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세상의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을 대항하는 영적 전쟁이자 혁명입니다.

‘종교의 영’은 이런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사단이 사용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겉으로는 마치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고 지키려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철저히 위장하고 나타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고 수세기에 거쳐 성경 말씀을 필사하고 또 필사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필사한 그들의 성실함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이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순수하게 해석하기보다, 열심을 다해서 지켜낸 자신들의 전통을 근거로 삼아 성경을 해석하였습니다.

전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은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예수님을 거절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이 ‘종교의 영’은 살아 있는 계시의 말씀보다 기록된 형태 그대로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 그분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그 성경책 그 자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있었던 ‘종교의 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이 만든 교리를 잣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가지고서 복잡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성경 해석 방법이 곧 사람들이 만든 교리를 통합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애썼지만, 진정한 부흥이 왔을 때 성령님의 운행하심은 놓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들의 교리적인 이해를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 ‘온전한 교리(Sound Doctrine)’ 역시 갈망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교리’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교회가 어떤 교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분열되고 형제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전한 교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 자체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교리를 높이려는 ‘종교의 영’이 놓은 또 다른 덫에 걸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가 얼마나 정확한가?’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그리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삶을 통한 예배를 기준으로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숨은 동기와 우리의 태도가 그 심판 기준이 될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암송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외우고도 여전히 진리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계신 하나님보다 성경 자체를 더 사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빠진 채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를 하나님보다 높이 두는, 즉 성경 말씀을 우리의 우상으로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책으로 대신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율법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줍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가장 큰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배운 교리나 전통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 Ⅱ ) 

종교의 영은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권능대신 종교적인 것을 대치하려고 추구하는 악령입니다. 이 영의 주요 목표는 “경건의 능력은 부인했지만 경건의 모양은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을 차지하는 것입니다(딤후 3:5).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로 자신의 훈계를 끝맺었습니다. 이 종교의 영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마 16:6)입니다.

주님은 친히 가르치셨던 공과를 예증하기 위해서 종종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종교의 영은 마치 빵 속에 들어있는 누룩처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누룩은 빵의 내용물을 더해 주거나 영양적 가치를 높여주지는 않고 오직 빵을 부풀어 커지게만 합니다.

종교의 영도 이런 식으로 역사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생명과 권능을 더해주지는 않고, 그 대신 처음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으며 그 이후에도 거의 모든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교만을 확장시키기만 합니다.

종교의 영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의향, 즉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과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합니다.

종교의 영에 대한 교회의 대항은 마지막 시대의 웅장한 전투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해야 할 한 가지는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종교의 영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둠으로부터 구해내는 권위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 가공할 만한 원수로부터 진지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도록 요청해야 하며, 이 빛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시도록 요청해야 합니다.


( Ⅲ ) 

종교적인 죄 : 내 친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독교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 가장 힘들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떻게 기독교 귀신과 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내 친구는 귀신들이 기독교로 전향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기만을 위해 기독교적인 모습을 띤 종교의 영들을 확인하는 것이 힘들며, 또한귀신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말 자기들 안에 그러한 귀신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 것이다. (이사야서 1:13-20절 말씀 참고)

종교의 영들의 지배를 받는 종교적인 사람은 평생 사술에 관여한 것을 회개하고 있는 사람 만큼이나 축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사술의 영들과 종교의 영들이 사람들의 영에 미치는 영향에는 별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두 부류의 귀신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거듭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체험한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종류의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고, 올바른 종류의 기독교적 행동을 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거듭났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관행들 : 하나님 자신보다 그리고 하나님과 누리는 관계보다 종교적 관행을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사탄의 기만을 당할 수 있는 잠재적인 목표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종교적 관행이 우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 생활안에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보아 왔다. 실례를 들자면, 성가대, 음악 그룹, 오르간, 회중석, 이전의 목회자,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교회 묘지, 교회의 전통, 교회의 설립자들, 교회 일정, 기도 책자, 찬송가, 성배, 강대상, 성만찬, 설교, 주중모임, 성경 등이 있다. 성경을 광신적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우상숭배의 미묘한 또 다른 형태이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대상들과 전통 혹은 관행과 연결된 종교의 영들로 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야 한다. 기독교의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들은 매우 다양하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귀신들은 자유주의, 고교회, 복음주의, 보수주의, 좌파, 우파, 은사주의, 비은사주의, 은사주의적 복음주의, 은사주의적 가톨릭,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조합들.... 

사탄이 종교의 영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중요한 직분에 앉을 사람들을 선출할 때에 명백히 나타난다

사탄은 겉으로는 올바르게 보여도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은 자들(이들은 그들이 옳다고 믿을 것이다)을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앉게 하려한다.

  
 ) 

날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 존 비비어
  
"나의 임재가 없이도 만족한 인생을 살아가는 너는 어찌된 것이냐? 나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데도 그렇게 거리감을 두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영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주신다.
하나님은 끈질기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특히 좋아하신다.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편 42:4)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갈망을 내 마음에 품었더니,
그로 인하여 마음이 아파온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를 지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별시켜준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고백을 하거나, 교회에 출석을 하거나,
아니면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 되거나 하는 것으로
우리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구별된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구별시켜준다.

구원 받는다는 것은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일생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생한 경험으로,
인간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갈망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에 부응하는 삶이다.

종교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인간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슬쩍 바뀌치기 해버린다.

"존, 너는 종교의 영이 무엇인지 아느냐?"
"주님, 잘 모르겠는데요."
"종교의 영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나의 말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힘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과 겸손이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은 더욱 겸손하게 된다.
동시에 겸손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된다.

교회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존재는 성령님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성령님에 대하여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성령님은 자신을 내보이십니다." 

자신이 믿지않는 것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으로부터만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 논리, 필요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만 응답하신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은 거기에 감동 받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보이면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인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단순하게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를 때 믿음이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은 말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존대하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이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아니다.
성경의 소망은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거주지는 확장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주하실 자리를 더 넓혀드리기 때문이다.
방언을 무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기도 방법이다.

나는 경배와 찬양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상 먼저 마음을 고요하게 한 후에,
하나님의 영 안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갈망이나 성령님의 정서를 느껴보려고 한다.

나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설교를 하지 않겠노라고 하나님과 약속했다.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 선한세상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