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4일 토요일

[스크랩]유태인은 누구인가?


세계사 최대의 터부 - 유태인은 누구인가?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내부사정은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다. 유태인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생활습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유태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아시케나지 유태인과 세파디 유태인이다. 아시케나지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한다. 이들은 중세로부터 유럽에 이주한 유태인으로 1948년 이스라엘공화국 건국 후 대거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즉 백인계 유태인의 총칭인 것이다. 한편 세파디란 원래 스페인을 의미하며, 지중해 연안, 특히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태인으로 이들은 중동이나 북아프리카로 쫓겨났다가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셈계의 사람들이다. 텔아비브의 고급주택지에 사는 부유층 엘리트들은 아시케나지이며, 한편 저소득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세파디이다. 건국 후 세파디가 수상이 된 적은 아직 없다.

몇 년 전 이스라엘 국내에서 아시케나지와 세파디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때 밤중에 “아시케나지는 하자르로 돌아가라!”라는 비난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세파디가 주장하고 있는 아시케나지의 고향나라는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8세기 이전의 세계에는 아주 적은 혼혈을 제외하고는 백인 유태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 수많은 백인 유태인이 등장하게 된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것이야말로 수수께끼이며 백인 유태인의 뿌리에 관한 세계사 최대의 금기사항인 것이다.

1977년 자신도 아시케나지 유태인이었던 유명한 작가 아서 케스트러가 『제13지파』라는 책을 내놓았다. 백인계 유태인의 뿌리를 성실히 조사해서 쓴 이 책은 세계사의 상식을 근본에서부터 뒤집는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출간을 금지한 나라도 있다. 1983년 케스트러는 수수께끼의 자살을 하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는 이 책을 저작 목록에서 생략하고 있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당시의 서한이나 기록에 근거한 학술연구가 대부분 사실로 판명되었다. 세계 유태인의 90%를 점하는 아시케나지는 사실상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터키계 백인(코카소이드)인 하자르인을 뿌리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7세기경 코카서스에서 카스피해 북쪽 중앙아시아에 인구 약 100만 명 규모의 하자르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 그들은 터키계 백인들이었으나 국교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동로마제국과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사라센제국은 하자르한국을 가운데 두고 정치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점점 양국의 종교적 간섭을 받게 되고 어느 쪽의 종교로 국교를 정해도 국가 전체가 전화에 휘말리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된 하자르왕 칸 부란은 양쪽 종교의 뿌리인 유태교로 개종했다. 이 정책의 결과,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셈계 민족이 아닌 유태교 국가 탄생’이라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후 하자르한국은 몽고제국의 공격으로 12세기경 멸망했고 이때 하자르한국에서 발생한 대량의 난민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동유럽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이 개종유태교도인 하자르난민이 나중에 바로 아시케나지 유태인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이다.
물론 백인유태인을 가리켜 ‘거짓 유태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유태공동체에서는 구약성서시대부터 언제나 개종한 외국인도 ‘할례’를 받으면 유태인으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 셈족의 사람이 돌연 셈족으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속에는 셈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유태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세계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국제금융그룹을 형성하고,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600만 명의 유태인학살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유태인은 국제사회에서 유태인 국가의 재건을 승인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대참살에 의해 흘려진 피가 아브라함의 자손의 피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유태인 국가수립에 대한 역사적 토대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을 살펴보면 왜 이스라엘공화국이 ‘유태인’이라는 말의 정의를 애매하게 방치하고 혈통에 따른 유태인의 존재 의의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지가 이해된다. 중동문제는 복잡한 유태인 국가 내의 이중구조라는 현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서라는 필터가 없다면 유태인이 누구냐 하는 것마저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아랍인과 유태인이 오늘날과 같이 증오하고 죽이고 하는 일은 없었다. 유태인도, 아랍인도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셈계 민족이며,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셈계 민족의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현재와 같은 유혈항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증오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시킨 원동력은 ‘시오니즘 운동’이다. 이 시오니즘 운동의 배후에서 철저하게 지원하고 자금을 원조한 사람이 유태인 대부호 로스차일드 경이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정부는 유태인에게 연합군을 지원하면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재건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벨포어 선언 이전에 아랍 쪽에도 아랍국가수립을 약속하고 있었다. 바로 ‘후세인, 맥마흔’ 선언이다. 영국의 이러한 이중외교가 정치적인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 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동정적 국제여론을 얻은 시오니즘 운동은 염원인 유태국가수립을 달성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히틀러에게 막대한 자금원조를 한 것도 다름 아닌 로스차일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오니즘은 비셈계민족 하자르인들의 민족주의 그 자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다. 유태계 미국인 저널리스트 알프레드 M. 리리안슬은 『유태의 커넥션』에서 시오니즘의 실태를 고발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아브라함의 계약’이라고 말한다. 이 계약의 목적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축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축복 받은 유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보는 것으로 이교의 인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유일신을 알게 되고 그 축복이 모든 민족에게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유태민족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것은 그들이 타민족보다 더 ‘우수했기’ 때문도, 그들이 ‘우월 민족’으로써 군림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모든 민족에 대한 ‘축복의 근원’이 된다는 목적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유태인들은 아브라함의 계약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이방인을 멸시하고, 자기들만이 우월한 민족이라고 하며, 더구나 우상숭배에 빠져서 예언자들의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리리안슬은 시오니즘이야말로 왜곡된 선민의식에 기초한 잘못된 민족주의이며 과거의 유태교도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과거 예수를 적대한 유태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의 토지를 사들여 유태인 국가를 만들려고 궐기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이미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초 정통파 유태인들은 시오니스트 운동에 반대했다. 그들은 유태국가재건은 완전히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서를 믿는 신앙에 따라 정치적인 시오니즘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 공화국의 독립을 쟁취했다. 이것은 실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승리하겠다고 하는, 성서가 말하는 전형적인 실패의 반복이다. ‘신앙으로 얻어져야 하는 숭고한 비전’인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적인 힘으로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결과적으로 예언은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방법은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어난 사실은 예언을 성취한 것이었다. 이렇게 피로 얼룩진 역사를 창출한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에 결과로서 일어날 현실을 미리 예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가상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슬람교도는 알라의 이름으로 테러를 반복한다. 기독교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탄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유태교도는 야훼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것을 본 무신론자는 “그러니 하나님은 없는 거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모두 자신의 선입관과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일 뿐이다. 인간의 에고가 불식되지 않는 현실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비난한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이런 일이 생긴다”고. 그러나 성서는 태고적부터 선언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악이 나타난다고. 토대 없는 맹신, 실천하지 않는 신조… 이렇게 무익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가상현실을 만드는 기술도 인간의 죄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공상이 아닌 현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버추얼 리얼리티가 아니고 바이블 리얼리티인 것이다.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이란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로서 ‘원리’라는 뜻이다. 성서는 아주 먼 옛날부터 이것을 선언한다. 이는 우리 존재의 뿌리에 관한 커다란 선포인 것이다. 또한 성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세상이 로고스로 창조되었고 인간은 창조자의 지고한 의사에 의해 디자인된 존재라고 하는 선포이다. 당신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고 당신의 존재 그 자체가 만유(萬有)의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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